좋은 시조

[스크랩] 강은미 시인의 <자벌레 보폭으로> <겨울 삽화> <바위섬> <LP로 오는 봄> <달이 한참 야위다>

heystar 2011. 3. 24. 10:05

 

 

움츠리면 몸이었고 쭉 펴면 길이었을  

연체의 습성으로 한 생을 주무르던  

곱사등 연초록 일념이 산 하나를 넘는다.

 

다 두고 나서는 길 하늘에 짐이 될까  

절망이 늘 그렇게 희망 쪽으로 다리를 놓듯  

내 삶의 가장자리엔 초록빛이 가득해!

 

인정 없는 세상에서도 굽힐 만큼 굽히리라  

더도 아니 덜도 아니 딱 그만한 보폭으로  

눈 뜨고 길 잃는 세상, 눈 감고 또 길을 낸다.    -강은미, <자벌레 보폭으로> 전문

   

 

 

길이 되기 위해

생의 날줄을 지우리라

햇살 한 줌 바람 한 줌

하루 한 끼로 사육되는

번영로 삼나무 숲이

아랫도릴 보인다.

 

춥고 가느다란

그림자가 포개지면서

개발의 기계톱에

여지없이 잘려져 나간

침엽수 밑둥치들의

야윈 뼈가 뒹굴고,

 

허연 스크럼의

겨울 숲을 일으켜 세우며

먼발치 오름들이

오래 참던 눈발을 부를 때

까맣게 원심력 키우는

아, 저기 바람까마귀!                     -강은미, <겨울 삽화> 전문

 

 

 

사랑에 길을 잃고 바위가 된 그 사람

 

 

침묵의 천길 물 속 그 한없이 까만 밤을

 

 

저 혼자 가슴을 쓸며 파도 앞에 서 있다. 

 

 

 

하루 열두 번씩 울다 웃다 잠드는 바다

 

 

연신 새우등살 앙갚음을 몸으로 막던

 

 

오래 된 칼자국 하나가 가로줄을 그었다.

 

 

 

뜻이 깊을수록 그 행간이 섬으로 뜨는

 

 

뼈 숭숭 바람 숭숭 그 인고의 깊이에서

 

 

바다도 투정을 멈추고 새벽잠에 들었지.         -강은미, <바위섬> 전문

 

 

 

 

 

 

   

                     

               

여기서 오 분 거리 삼성혈 적송 숲에

 

 

 

빗살 같은 바람들이 연둣빛 길을 열면

 

 

 

귀 쫑긋 휘파람새가 봄을 휘청 물고 오고

 

 

 

 

한 양푼씩 나눠받은 개나리 봄볕  좋아

 

 

 

반투명 속옷차림 이웃집 가족사도

 

 

 

보란 듯 단층 옥상의 빨랫줄에 빛난다.    -강은미, <LP로 오는 봄> 전문

 

 

 

 

   

발소리 낮추면서 저녁 밀물이 다가오네

섬과 마주하고 발가벗던 노을 앞에

하나 둘 말문을 여는 빛깔들이 쌓이고.

 

달 옆에 별이 하나, 섬 끝에 촛대 하나

하늘과 내통하던 남보라색 수평선에

어젯밤 날려간 꽃씨도 잔뿌리를 내렸을까.

 

살만하면 이별이듯 이별 앞에 밑줄 긋듯 

사랑의 마침표 자리에 섬 하나가 떠오르듯

점점이 수로를 따라 그리움을 켜단다.

 

그 푸르던 풀벌레소리 다 어디로 숨었을까

늦가을 황조기 떼가 노을 속으로 잠적한 후

보름째 묵묵부답인 달이 한참 야위다.           -강은미, <달이 한참 야위다> 전문

 

 

* 2010년 <<현대시학>> 신인문학상 추천 작품입니다.

 

 

 

 

 

 

 

출처 : 유심 시조아카데미
글쓴이 : 홍성란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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