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쌍계사를 떠나는 거북이 - 박승민

heystar 2016. 5. 20. 00:31


     쌍계사를 떠나는 거북이

 

 

                                                      박승민


 

 

  

  게릴라성 호우가 밀물처럼 절 마당에 들어온다

  좌계左溪와 우계右溪가 용틀임치는 계곡으로 나 이제 떠나고 싶네

  살아서 지은 죄

  한 천년쯤 선사*를 등에 태우고

  한 발짝도 산문山門을 나가지 않았으면

  그만 탕감되지 않았겠는가

 

  물위를 떠가는 하동 둥둥 십리 벚꽃 길

  지나고 지나서 섬진강변 매화마을 마저 지나서

  남해의 미조항까지 흘러가야겠네

 

  서해와 남해의 파도가 만나고 헤어지는 그 어디쯤에

  깎아지른 12폭 병풍 같은 노을은 없어도

  등 하나는 따뜻하게 가릴 수 있는 조선소나무나 한 수 거느리고

  나, 다시 한 천년쯤 그 무엇도 아닌 채

  부표처럼 떠다니고 싶네

 

  여기도 아니다 싶으면 네 발로 어설프게 헤엄쳐

  머나먼 쪽빛 속으로 그냥 가라앉았으면 좋겠네

  수만리 심해의 산호초 옆에 바윗돌 하나로 비스듬히 누워

  벌겋게 물들어오는 오색단풍이나 구경하다가

  그러다가 더 쓸쓸해지면 낮잠처럼 고요히 숨을 놓겠네

    

 

*선사는 진감선사를 말하며 그는 통일신라후기의 유명한 고승으로 귀부에 세운 탑비에는 고운 최치원이 지은 비문이 있다

  

-출처; 박승민 시집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 2016) 중에서



경북 영주 출생.

숭실대 불문과 졸업. 

2007년 《내일을 여는 작가》를 통해 작품활동 시작.

시집; 『지붕의 등뼈』 『슬픔을 말리다』(실천문학, 2016)

2016년 제2회 <박영근작품상> <가톨릭문학상>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