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보르헤스 <칼의 형상>을 읽고 - 박해성

heystar 2016. 2. 4. 14:16

보르헤스 <칼의 형상>을 읽고 - 박해성



      관자놀이에서 광대뼈로 이어진 완벽한 활모양의 흉터를 가진 사내, 그러나 ‘그의 본명은 중요치 않다.’(『픽션들』p, 190) 나는 들어서면서부터 의미심장한 메타포에 발이 걸려 멈춰 선다. 그래, 우리 모두 어딘가에 흉터 하나쯤 지니고 살지 - 누군가는 입술에 어떤 이는 가슴에, 팔에, 엉덩이에… 영광스러운 혹은 수치스러운… 보이게, 안 보이게…

    보르헤스의 익명성은 늘 인류의 보편성에 가 닿는다. ‘너’라면 어떻고 ‘나’라고 하면 어떠한가, 그러니 그 이름이 중요할 리 없다는 작가의 말에 나는 공감할 수밖에 없다.


      <영국인>으로 추측되고 있는 이 작중 인물은 실은 ‘아일랜드인’이다. 보르헤스는 우리가 흔히 저지르는 사소한, 그러나 중대한 진실의 오류를 지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영국과 아일랜드는 서로 총칼을 겨누는 피의 내전을 겪었다. 적과 아군을 말 한마디로 바꿔치기하는 일반적 루머가 진실을 능가하는 현실로 통하는 것이 왠지 남의 일 같지 않아 씁쓸하다.

    어찌되었든 영어와 스페인어,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는 주인공을 독자인 나는 지역적 한계성을 극복한 지구인의 표상으로 읽기로 한다. 이쯤에서 대부분의 독자들 역시 국경은 물론이고 언어와 지리, 문화 등등의 장벽을 아무렇지도 않게 넘나드는 (이름하여 세계주의를 지향하는) 보르헤스에게 자신도 모르게 절반쯤 넘어갔을 것이다.


      ‘그 지역 들판의 주인이었던 까르도소는 자신의 땅을 팔려고 하지 않았다.’(p,190) 이 뜬금없는 한 마디가 다시 또 내 발목을 잡는다. 까르도소라는 인물이 땅을 팔려고 하든 말든 이 이야기의 흐름과는 별로 상관이 없다는 게 객관적인 나의 판단이다. 그러나 보르헤스는 단 한마디도 허튼소리를 하지 않는다는 것 역시 작가에 대한 나의 믿음이다. 그 신뢰성을 바탕으로 몇 번이고 이 대목을 반복해 읽은 결과 나름대로 답을 하나 찾았으니…

    인간은 어딘가에 스스로 얽매인 존재들이다. 까르도스는 땅에 얽매어 자유롭지 못한 인물이다. 내가 시에 목을 매듯, 주인공이 죄의식에 갇혀 살듯 - 이를 뒷받침하는 것은 다음 구절이다. ‘들판은 잡초들로 무성했다. 웅덩이들의 물은 수질이 형편없었다.’(p,191)라는 말의 뜻은 죄의식으로 자학하는 주인공의 내면을 대변하는 은유가 아닌가… 넘겨짚는다.


      이쯤 되면 나는 화를 낸다. ‘〜처럼’, 이나 ‘〜 같이’ 같은 격조사를 써서 간단히 묘사할 수 있는 상황을 보르헤스는 비밀작전인 듯 숨기고, 비틀고, 빙빙 돌리고, 흔들고, 심지어는 건너뛰고, 끼워 넣고… 아, 빌어먹을! 절로 욕이 나오지만 다음 순간, 그 어떤 발칙한 트릭도 환상으로 승화되는, 미치도록 결이 섬세하고 아무렇지도 않게 아름다운 그의 문장 앞에 순순히 무릎을 꿇고 만다. 이런 의뭉스런 노인네 같으니라구… 나는 아무래도 글 쓰는 짓거리를 때려치워야 할 것 같은 자괴감에 먹먹해진다.


      ‘ 나는 최근에 북쪽지방을 지나다가 까라구이따 강의 갑작스런 범람으로 하룻밤을 꼴로리다에서 머물게 되었다.’(p,191) 소위 <영국인>의 손님으로 등장하는 인물, 즉 보르헤스의 이 담담한 진술을 나는 돌발적으로 발생하는 생의 의외성으로 독해하기로 한다. 예기치 않게 강물이 범람 하듯 주인공이 ‘잔인할 정도로 엄격하고 세세하도록 공정’(p,191)하게 관리해왔던 내면의 죄의식 역시 불시에 범람한다. ‘단 한 점의 부끄러운 일이나 수치스러운 정황조차도 미화시키지 않고 말하겠다는 조건 하에서’(p,192)


      <영국인>의 내레이션은 액자형식으로 이어지는 이야기 속의 이야기, 즉 복층구조로 진행된다. ‘아일랜드는 우리에게 유토피아적 미래이기는 했지만 반대로 견딜 수 없는 현재이기도 했지요.’ (p,193) 시대적 상황에 의해 독립군이 된 주인공의 이야기가 왜 남의 일만 같지 않을까, 한동안 생각에 젖기도 한다.

    ‘그것은 하나의 씁쓰레하면서도 감미로운 신화였고, 원형의 탑들임과 동시에 붉은 빛깔의 늪이었지요. …… 전쟁에서의 영웅들이었고, 신들이었던 황소를 훔치는 얘기를 담은 거대한 서사시였지요…’ (p,193)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내 아들과, 내 아비와, 내 연인을 돌려주지 않는 전쟁을 이렇게 서정적으로 묘사하다니… 오 젠장! 나는 확, 책을 덮고 눈을 감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아름다워서 더 슬픈 감정은 오래 숨길 수가 없다.


      작중 문제의 인물로 등장하는 존 빈센트 문이라는 청년은 ‘공산주의 교본을 열정적으로, 그러나 제대로 이해를 하지 못한 채 독파를 했었습니다.’<p,193) 라는 캐릭터이다. 선무당이 사람 잡는 꼴이랄까, 마르크스의 유물론에 심취한 청년은 눈 뜬 장님 코끼리 더듬듯 ‘세계의 역사를 야비한 경제투쟁의 역사로 간략화 시키’(p,194)는 등 비판적이고 사변적인 논쟁으로 불안한 ‘나’를 더욱 피곤하게 만든다. 설익은 이론으로 ‘자신의 의견을 그저 마구 내 뱉’는 이상주의자들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인물상이다. 그러나 투사적 혁명이론으로 무장한 청년은 몇 발의 총성에 얼어붙는 겁쟁이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인간의 적나라한 이중성이 들통 나는 순간이다.


      표리부동한 겁쟁이와 순수한 열정으로 대비되는 두 파르티잔의 도피생활이 시작되는 장소는 (물론 작가의 잘 계산 된 의도겠지만) 공교롭게도 ‘물의를 일으켰고, 일견 19세기의 역사 전체를 구성하는 서로 주제가 다른 책들이 가득’(p,195)한 곳이었다. 과연 보르헤스답다. 이럴 때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은 책들이 대신하도록 각본이 짜여 있는 것이 보통이다.


      작중인물인 ‘나’로 인해 절체절명의 순간에서 구조된 청년은 <당신은 너무 무시무시한 위험을 자초 했어요>(p,195) 라는 말로 동지인 ‘나’를 힐난한다. 적반하장이다. 이는 어떤 상황이든 책임을 타인에게 전가하려는 비겁한 부류들의 전형성을 그대로 보여주는 명장면이다. ‘고맙다’는 말 대신에 스스로의 부끄러운 행동을 커버하려는 그러한 치졸함이 청년을 더욱 교활하고 초라하게 만드는데 충분히 효과적이다. 보르헤스가 심리학에도 일가견이 있었음을 가히 유추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사람이 어떤 일을 했다면 그것은 마치 모든 사람들이 했던 거나 다름이 없는 거지요. 그래서 에덴동산에서 저질러진 불복종이 인류전체에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은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닌 거지요. 그래서 단 한 사람의 유태인이 십자가에 매달리는 것으로 전 인류가 구원받는 다는 것 또한 전혀 부당한 일이 아니지요.’(p,196) 작전을 위해 동지들과 합류해야하는 상황을 모면하려고 무책임하게 눈을 감고 소파에 누워버리는, 누워서 경련을 일으키는 ‘도저히 치유가 불가능한 겁쟁이’ 앞에서 느끼는 ‘나’의 수치심은 - 결국 인류는 공동 운명체라는 진부한 지론으로 청년을 옹호하게 만든다. 이 부분에서는 ‘나’라는 캐릭터의 순수성을 돋보이게 하려는 작위적인 느낌이 들기도 하는데…

      하지만 이 문단에서 ‘셰익스피어는 일종의 가련한 존 빈센트 문이다라는’(p,196) 쇼펜하우어의 ‘일리 있는 말’에 나는 물음표를 남겨야겠다. 셰익스피어가 그의 작품 속에서는 엘리자베스 여왕을 희화화하고, 사회의 부패를 꼬집고, 당대의 정치를 비웃었지만 실제로는 그렇게 정의로운 인물이 아니라는 의미로 이해해도 되는지… 확신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이제 이야기는 클라이맥스로 치닫는다. 저명인사들의 병서를 손에서 놓지 않고 지낸 인텔리? 청년과 미련하도록 우직한 ‘나’는 같은 장소에서 9일을 보낸다. 그동안 ‘나’는 어둠을 틈타 은신처(별장)를 빠져나가 동지들의 복수를 하는 등 교전에 참여했으나 청년은 ‘별것 아닌’ 상처를 핑계로 장군별장에서 동료를 기다리는 일로 빈둥거리며 시간을 때웠다. 같은 시간 전혀 다른 상황에 놓인 두 사람의 내면세계를 시시각각 비교분석하면서 파고든다면 아마도 또 다른 심리소설이 탄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 본다. 여기서 간과할 수 없는 것은 <내가 선호하는 무기는 대포지요>(p,197)라고 말하는 청년의 허세다. 대포는커녕 총소리에도 경련을 일으키는 주제에… ‘그는 자신이 육체적으로 겁쟁이라는 것을 호도하기 위해 자신의 정신적 오만함을 과장했지요.’(p,197) ‘나’의 이 말에서는 굳이 중언, 부언이 필요하지 않겠다.


      10일째 되는 날, 영국군의 특수부대가 장악한 거리에서는 시체가 나뒹군다. 영국군들이 광장에다 꼭두각시를 세워놓고 그 심장을 쏘는 사격연습에 열중하는 가운데 드디어 겁쟁이 청년의 본색이 드러난다. 적의 눈을 피해 집으로 들어선 ‘나’는 내가 돌아오는 시간을 알려주며 체포하라고 밀고하는 청년의 전화 통화를 우연히 엿듣게 된다. ‘나의 친구는 합리적으로 나를 팔아먹고 있었던 거지요. 나는 그가 자신의 신변에 대한 보장을 요구하는 소리를 들었지요.’(p,198) 결국 ‘나’는 청년의 배신에 치를 떨며 밀고자의 뒤를 쫓는다. 쫓는 자와 쫓기는 자 양쪽 다 역시 쫓기는 자들이었으며 혁명 동지였다.


      ‘나는 그 반월 모양의 칼날을 가지고 그의 얼굴에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피의 반달을 새겨놓았지요.’(p,199) 여기까지 읽은 대부분의 독자는 ‘나’라고 지칭한 인물이 주인공이라고 생각했을 확률이 높다. 그러나 이전으로 돌아가 보면 얼굴에 반달 흉터를 가진 자는 이야기를 하는 소위 <영국인>이라 불리는 사람이라, 어리둥절해진다.

      지금 독자는 보르헤스 소설의 속임수 같은 ‘화자 바꿔치기’와 함께 ‘시점의 다양화 기법’의 마법에 걸려든 것이다. ‘내가 바로 나를 보호해 주었던 사람을 밀고했던 거요. 내가 바로 빈센트 문이요.’(p,199) 액자를 벗어난 실제 주인공의 목소리다. 역시 보르헤스다운 극적 대반전이다.


      나의 독서 스타일은 속독에 속한다. 게다가 작가의 의중을 헤아리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느끼느냐를 앞세운다. 즉 해석이나 분석보다는 재미와 감동 쪽에 비중을 두는 편이다. 그래서 보르헤스의 작품은 사실 난해하다. 복잡하게 얽힌 이야기의 복층 구조나 엎치락뒤치락 정신없이 뒤바뀌는 다중화자와 다각적인 시점 같은 실험적 기법은 물론이고 아무데나 절묘하게 끼워 넣는 시적 메타포는 보물찾기를 하듯 작가의 유희성을 대변하고 있다 하겠다. 뿐만 아니라 범세계적인 상호텍스트성을 앞세워 동서양을 막론하고 현학적으로 인용되는 저서와 작가들, 게다가 그가 거론한 자료들은 실재와 허구를 넘나들고 있어 단편임에도 불구하고 하이퍼텍스트적인 독서기법을 요구하는 게 아닌가. 작품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각주를 눈 빠지게 읽다보면 오, 맙소사! 인내의 한계를 느끼고 책을 팽개치게 마련이다.


      이러한 보르헤스의 상호텍스트성은 문학 언어가 靜的이라는 가정을 부정하면서 작가와 작품이 대화를 통하여 動的이 된다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이는 “모든 텍스트는 인용의 모자이크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든 텍스트는 다른 텍스트의 흡수이며 변형이다”라고 주장한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말과 “텍스트란 인용물들의 직물” 이라는 롤랑 바르트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소위 ‘상호텍스트성’이라는 미명하에 남의 작품을 그대로 베끼는 ‘모방’을 합리화하는 우리의 현실은 부끄럽다. 이는 상호텍스트성의 오용이요 남용이다. ■


<박해성의 내멋대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