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문제적 아버지가 죽었다 - 김영하

heystar 2016. 1. 11. 02:53

 

                       문제적 아버지가 죽었다 - 김영하

 


     눈이 펄펄 내리던 크리스마스 이브에 미당 서정주가 세상을 떴다. 영화 잡지에 시인 이야기를 하게 돼서 안됐지만, 그래도 미당 얘기를 하지 않고서는 어쩐지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아, 연재의 첫 번째를 미당 얘기로 막는다.


     문단에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무렵, 나는 시인 아무개와 미당의 문제를 두고 다투고야 말았는데, 다툼의 전말은 이러했다. 80년대에 미당이 저지른 행적을 알고 있는 이상, 그의 시에서 더이상의 어떤 아름다움도 발견할 수 없다는 나, 미당의 시에서 아무런 감흥을 받지 못하는 너같은 작자는 문학을 할 자격이 없다는 그. 우리의 다툼은 해결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이런 미학적 가치판단의 문제는, 한쪽이 변하기 전에는 해결되지 않는다. 그것은 80년대식 용어로 말하자면, 세계관의 문제다. 영악한 우리는 더이상은 그 문제로 다투지 않았다.

 

     그 뒤로 세월이 흘렀다. 다른 시인이 내게 미당 시 전집을 선물해주었다. 어느 어둑한 밤, 나는 가만히 앉아 시편들을 읽었다. 오, 빌어먹을. 욕이 나왔다. 그리고 곧 입을 다물었다. 이를테면 나는 이런 시구의 광채 앞에서 할말을 잃었다. "아름다운 배암 / 얼마나 크다란 슬픔으로 태어났기에, 저리도 징그러운 몸뚱아리냐." 또는 "무슨 꽃으로 문지르는 가슴이기에 나는 이리도 살고 싶은가" 라든지, "피가 잘 돌아... 아무 病도 없으면 가시내야, 슬픈일좀 슬픈일좀, 있어야겠다" 혹은 "어찌하야 나는 사랑하는 자의 피가 먹고싶습니까?" 같은 구절 앞에서, 내 자신이 이다 도시나 로버트 할리 같은, 그저 한국말 좀 할 줄 아는 외국인처럼 느껴질 때, 나는 고만 글쓰는 일을 콱 때려치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제서야 나는 비로소 나와 다툼을 벌일 뻔했던, 그 선배 시인의 심사를 조금은 가늠하게 되었다. 미당의 시 앞에서 우리는 그저 비재에 몸부림치는 아둔한 습작생에 불과하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증오스럽다. 그 증오에는 질투의 피냄새가 섞여 있다. 피블로 피카소의 부고를 받은 뉴욕의 한 화가가, "오늘 내 아버지가 죽었다"고 외친 그 심정을 나는 이제 이해할 수 있다.


     그런 미당이 20세기의 마지막 크리스마스를 한 시간 앞두고 세상을 떴다. 젊어서는 친일파였으며 늙어서는 전두환에게 축시를 바친, 정치적으로는 옳지 못했으나 너무도 아름다운 시를 남긴, 문제적 인물 미당은 20세기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버렸다. 그러나 그가 남긴 문제들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다. 


     이를테면 우리는 이런 의문에 직면해 있다. 에술가에 대한 정치적 치죄는 어디까지 가능한가.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한 입장에 서 있었던 시인, 작가, 화가, 무용가, 가수에 대해, 또 그들의 창작물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친일하거나 전두환에게 협력할 기회도 없었던 이들에게도 돌을 던질 자격은 있는 것일까. 내가 그였다면 과연 친일과 독재협력의 멍에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을 것인가. 일본이 영속하리라 철석같이 믿고 일본에 협력했던 친일파 지식인은 팍스아메리카나의 그늘 아래 미국적 가치의 한국화에 힘쓰는 친미 지식인들과 얼마나 다른가.

     월남전이 자유를 위한 성전이니 어서 젊은이들을 보내야 한다고 외쳐댔던, 그러나 사실은 미국의 세계지배전략에 호응했던 나팔수들과 서정주는 어떻게 다른가. 가난과 장애 속에서 친일이 죄인지도 모른 채, 관공서에서 시키는 일을 했을 뿐인데도 친일파가 되어버린 운보 김기창과 같은 사람의 예술은 어떻게 평가되어야 하는 것일까. 아름다운 것을 아름답다고 말하는 것은 정말 죄가 되는 일일까. 민족이라는 가치는 아름다움이라는 가치에 항상 우선하는가.

     "나는 아일랜드 사람이 아니"라고 선언했던 <율리시즈>의 작가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은, 그가 자신의 고향과 민족을 배신했다는 이유 때문에 평가절하되어야 하는가. 내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과 사회의 일반적 통념이 배치될 때, 어느 쪽을 따라야 하는가, 따위.


     미당은 민족반역자이며 독재협력자라고, 그러니 그에 대한 어떤 추모도 역겹다고 말하는 것은,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쉬운 일이다. 미당의 시를 읽은 적이 없다면 더더욱 쉽다. 게다가 신나는 일이다. 아주 적은 에너지로 도덕적 우위를 확보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그의 모든 정치적 실수와 인간적 결함을 알면서도 그를 껴안고 가는 자들, 나는 그런 이들 몇몇을 알고 있는데, 그런 결정은 쉽지 않다. 죄많은 이의 시신에 발길질을 하는 자는 많아도 그를 거두어 장사를 치르는 이는 드물다.

     그러니까 어쩌자는 거냐, 고 내게 묻는다면 나로서는 할말이 많지 않다. 그러나 분명한 것 한 가지, 20세기가 저물고 새로운 세기가 시작되는 지금, 미당을 읽는 것은 즐거우면서도 불길한 일이라는 것. 그를 어떻게 매장할 것인가에 사실은 우리의 20세기가, 누더기 근대문학이, 오욕으로 점철된 현대사가 매달려 있다. 이런 얘기를, 영화잡지의 지면을 빌려 하고 있으니 송구스럽다. 독자들도, 그리고 망자께서도, 빈소에 못 찾아간 어느 심약한 자식의 부조금이려니 여겨주면, 더할 나위 없이 고맙겠다.

씨네21 칼럼 '이창' - 김영하

[출처] http://egloos.zum.com/mayuzuki/v/714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