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설詩說

Macbeth - 박해성

heystar 2015. 10. 8. 14:44

컴퓨터가 느려졌다.

저장공간 확보를 위해 문서를 정리하다보니 2006년에 본 연극 비평? 이 있었다. 버리기 아까워 여기 올린다.

 

 

 

예술의 전당에 선 'Macbeth'

 

 

1. 들어서며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하나인<Macbeth>는 11세기 스코틀랜드의 실존인물로 전해지고 있다. Shakespeare는 이 전설과 사실적 증언을 토대로 한편의 비극을 탄생시켰다.

이야기는 마녀들의 예언으로 시작된다, 예언을 암시 받은 Macbeth는 사촌인 덩컨왕을 살해하고 국왕의 자리에 오른다. 그러나 함께 마녀의 계시를 들었던 뱅쿼장군이 마음에 걸리자 그마저 제거해 버린다. Macbeth가 이처럼 악행을 거듭하는 인물임에도 Shakespeare는 그를 철저한 악의 화신으로 치부하지 않는다. 공화정의 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Caesar를 살해하는 Brutes가 끝내는 합리화되듯이 작가는 Duncan왕을 시해하고 국왕이 된 다음부터 잠을 잃고 유령처럼 피를 부르는 Macbeth에게 살인에 대한 죄책감에 시달리는 인간적인 일면을 부여함으로써 관객들로부터 더욱 극적인 공감을 불러일으키려 시도한다. 반면에 Macbeth 부인을 ‘사악함’ 그 자체로 묘사하여 끝내는 번민으로 자살하도록 몰아간다. 여성에 대한 작가의 작위적인 편견이 엿보이는 부분이기도 하다.

Shakespeare는 이 작품에서 인간의 양면성을 드러내는 대조적 plot을 교차시키면서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양심, 삶과 죽음의 운명적인 갈등을 부각시키고 있다.

 

2. 토월 극장에서 본 연극 <Macbeth>

 

예상대로 무대는 침침한 迷夢에 쌓여있었다. 뻔히 다 아는 스토리를 연극을 통해서 접할 때는 이야기 이상의 것을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연극은 관객을 설레게 한다.

현대적인 재해석, 시각적 은유를 통한 축제적인 Show

.......객석과 무대, 그 경계의 활용을 통하여 연극 공간의 시각적 은유를 극대화하고, 드라마 안에서 벌어지는 일상과 환상, 삶과 죽음을 객석과 무대 등장과 퇴장의 공간으로 환치시킨다. 서사와 시청각적 이미지를 결합하는 축제적인 Show의 공간에서 끊임없이 순환되는 욕망의 구조를 새로운 울림과 에너지로 전달하고, 감각적 매체와 감각으로 인하여 발생하는 욕망의 비극이라는 주제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여 전달하게 될 것이다.

 

인용한 부분은 공연을 보러가기 전에 미리 주최측 홈피에서 스크립해 놓은 <제작의도>의 일부분이다. 이에 덧 붙여 * “맥베드?의 견고한 해석, 더 이상의 ?맥베드?는 없다”고 그들은 장담했다. 그렇지만 유감스럽게도 나는, 아니 나와 동행한 우리친구들은 그들의 장황한 주장에 전혀 동의할 수 없음을 밝히고 싶다. 나는 이미 학교에서 학생들이 공연하는 연극으로 <Macbeth>를 접한 경험에 비추어 나름대로의 의문을 제기했다.

 

의문: 1) 현대적 재해석의 본질은 무엇인가?

 

웅장한 철제장치가 입체적인 훌륭한 무대는 허술한 학교 극장의 무대보다는 압도적이었다. 물론 무대의상도 비교가 되질 않는다. 모든 등장인물들은 그들의 의상으로 상징화된다. 죽은 자나 잠든 자는 껍질뿐인 옷으로 공중에 걸려 흔들거린다, 인상적이었다.

 

그렇지만 고래고래 고함만 지르는 배우들의 대사는 “악한 것은 아름답다, 아름다운 것은 악한 것이다” “광란하는 난세에도 시간은 진행한다” 하는 등등 우리가 익히 알고있는 소위 ‘名句’를 그대로 반복함으로써 별다른 감흥을 자아내지 못하고 말았다. 출연배우들이 입을 모아 함께 외쳐대는 대사 역시 웅장한 음향에 묻혀 어설픈 정치구호처럼 선명하게 접수되지 않았다.

 

한편 무대에 청소기를 등장시킨 뜻은 사회적 부패의 청산을 내포하고 있으리라, 하지만 청소부들의 난잡한 대사나 섯부른 성적 묘사는 모처럼 참신한 소도구의 의미를 희석시킨 결과를 초래했다. 무대장치에서 눈에 띠는 것은 물 펌프였다. 내 소견대로 그것이 인간의 근원적인 욕망을 대변하는 것이라면 연출가의 의도는 어느 정도 성공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정도의 소품으로 관객과 소통했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현대적 재해석의 본질'인지는 아쉬운 감이 남는다.

 

 

의문: 2. 연극적 흥미는 어디서 오는가?

 

연극은 인쇄물과 달리 현장에서 느낄 수 있는 시청각적이거나 혹은 감각적인 ‘재미’를 요구하는 것이 사실이다. 때로는 이러한 양념이 작품의 예술성과는 별도의 흥행적 성취를 좌우하기도 한다고 흔히 알려져 있다.

악의 화신으로 대표되는 Macbeth부인이 원작에서 남편의 편지를 받는 장면이 연극에서는 현대적으로 전환되어 전화를 받는 것으로 대치된다. 남편과 통화하는 여인은 나체로 목욕중이다. 정말 그래야 했는가, 연출자는 그 장면이 왜 그래야만 하는가 당위성을 먼저 제시했어야했다. 전쟁에서 승리하고 돌아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행위로 보편타당한가?

그렇다면 이후의 장면에서는 나레이터 역할을 하는 풍만한 여배우 역시 반라로 욕조에 들어 앉힌 의도는? 그 장면의 진행은 적절했는가? 유치하고 무의미한 ‘벗기기’는 포르노가 판치는 세상에서 작품의 품위를 손상시킬 뿐이니 생각해볼 여지가 있다. 불쾌하다!

 

여기서 잠깐; 이전에 남산 해오름 극장에서 봤던 연극<햄릿>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햄릿 역의 남자 배우가 나체로 당당히 관객 앞에 선다. 그러나 전혀 외설스럽다거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은 없었다. 그 이유는 그 이전의 무거운 장막을 끌고 높은 곳(=천국)으로 올라간 배우의 행위가 지상의 어둠을 거두어 무겁게 짊어지고 생과 사의 경계를 넘어서는 초월적의미로 관객에게 전달되기에 충분했기 때문이다. 관객은 순수의 이미지로 태어난 새로운 인류의 미래에 환호했다.

 

그러나 나는 느꼈다, 똑같이 벗는 인간의 행위가 어떻게 ‘아름다움’과 ‘추함’으로 가름되는지를..... 눈만 뜨면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첨예한 현실을 사는 관객들에게 오직 섹스어필을 위해 벗기는 장면이나 외설스런 행위가 흥미를 줄 수 있다는 사고방식은 이미 낡아빠진 전근대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을 연극관계자는 인식해야만 한다.

 

 

3. 금화극장의 연극 <Macbeth>

 

 

토월극장에서 공연 중에 많은 친구들이 잠깐씩 졸았다면 학교의 금화극장에서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한순간도 한눈팔지 않고 집중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아마도 학생들의 작품이라 크게 기대하지 않았던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비교도 되지 않는 무대에서 비교할 수 없는 배우들의 커리어에 유념한다면 다시금 기억해보니 그때 학생들의 <맥베드>공연은 가히 획기적 성공이 아니었나 상기해 본다.

 

평면의 무대에는 별다른 장치가 없다, 다만 이층높이에 매달린 시커먼 무쇠 솥에서 가끔씩 드라이 아이스로 피워낸 연기가 흔들리곤 했다. Macbeth를 충동질하는 아내는 자신의 감정을 욕망이 담긴 솥단지를 소리나도록 두드리거나 격정적으로 흔들어 뭉게뭉게 흰 연기가 천장을 덮는 것으로 표현했다, 그 정도면 인간 내면의 끓어오르는 욕망을 그려내기엔 충분하지 않은가!

흰 무명천을 두른 맨발의 배우들은 역동적인 군무로 폭력을 암시했으며 바퀴가 달린 책상을 침대 삼아 무대를 굴러다니는 러브신도 참신했다. 특히 아직도 기억에 남는 장면은 Macbeth가 아내의 가랑이 속에서 치마를 들추고 머리를 내미는 장면으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크고 강렬했다. 반면에 반복되는 키스씬과 아니면 “여자가 낳은 인간은 나를 죽일 수 없어”라는 대사를 포함해 설명처럼 지루하게 독백을 되뇌는 토월극장의 무대는 대조적이었다.

 

 

4. 맺는 말

 

 

객석과 무대, 그 경계의 활용을 통하여 연극 공간의 시각적 은유를 극대화하고,......일상과 환상, 삶과 죽음을 객석과 무대 등장과 퇴장의 공간으로 환치시킨다. - 제작의도에서 -

 

그들의 말대로 정말 그랬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를 포함해 불평하는 관객들의 안목은 좀 더 신중해야하지 않을까? 그저 한편의 연극일 뿐이다. 그러나 왜 이렇게 뒷맛이 씁쓸할까? 이런 감정이 나 하나 뿐이었으면 좋겠다. 더욱 내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작품이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상을 받았다거나 무슨 기금을 지원 받았다거나 하는 부수적인 뉴스 때문일게다.

무언가 아주 중요한 부분을 놓치고 변명처럼 남을 탓하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하수들은 할 수 없어”라는 소릴 듣는 것으로 위로 받고 싶다. 집에 와서 다시 한번 <맥베드>를 책으로 읽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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