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의 재난 - 홍일표
▶ 옮기는 말 - 그냥 밑줄이나 치면서 읽다가 "이건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야!" 하면서 여기 옮겨 적는다.
시의 재난
홍일표
1.
다른 색깔의 시를 배제하고 비판하는 사람들은 일부 젊은 시인들의 시를 자폐적 혼잣말로 매도하는 경우가 있다. 과연 그렇게 단순화시켜 접근해도 되는 것인지 생각해 볼 일이다. 한 편의 시에는 여러가지 정보가 있다. 그 정보는 시를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그러나 정보가 생략되거나 비약할 경우 일반 독자는 망연자실하여 길을 잃는다. 이게 뭐지? 시는 1,2,3,4,5가 아니다. 1-3-5가 되기도 하고 역순이 되기도 한다. 고전주의 회화와 인상파 화가들의 회화가 다르듯 과거의 시와 오늘의 시는 분명 표정도 색깔도 다르다. 그러나 그걸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이해불가의 벽에 막힐때 난해성, 자폐성 운운하면서 저건 시가 아니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암호이거나 정체불명의 외계 행성이라고 말하면서 인과율적 독법에 집착하여 시읽기를 포기하고 '친절한 시'를 역설하는 것이다. 흘러간 유행가 같은 친절한 시는 모든 걸 다 말해준다. 굳이 정보라고 할 만한 것도 없다. 눈 앞의 풍경을 사실 그대로 그려낸 고전주의 회화처럼 그냥 편하게 시에 대한 기본적 감식안만 갖고 눈앞의 언어를 읽어나가면 된다. 그러나 오늘날의 시는 예전의 어법에 기대지 않는다. 그들만의 고유한 말하는 방식이 있다.
또한 시는 단순히 의미 차원에서만 접근하면 십중팔구 도중에 시를 잃고 이리저리 헤매게 된다. 시를 구성하는 여러가지 요소가 있다. 그중에 대부분의 독자들은 의미찾기에 골몰한다. 잘못 된 시학습의 결과인 것이다. 주제가 뭐냐? 주제만 알면 시읽기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시의 몸체를 이루는 일부일 뿐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상당한 수준의 독자들조차 너무나 오랫동안 세뇌된 주제타령에 길들여져 의미찾기에 골몰한다. 음악을 들을 때 의미를 찾는가? 이 음악의 주제가 뭐냐고 말하는가? 그냥 청각을 통해 전달된 음의 색깔과 표정을 느끼면 되는 것이다. 시 또한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읽고 느끼는 일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느끼기도 전에 이 시의 주제가 뭐지라고 묻는다. 이때부터 시를 배우는 독자들은 시에 대한 흥미를 잃게 된다. 정형화되고 획일화 된 시읽기의 폐해가 얼마나 심각한지 이를 통해 알 수 있다.
시는 의미의 영역에 포섭되지 않는 디테일한 부분들이 있다. 이 부분은 불가해한 영역이기도 하고 이성이나 논리로 접근할 수 없는 신묘한 지점이기도 하다. 대개 지금까지의 시읽기에서는 이 지점을 간과한다. 의미화 되기 전의 것이지만 시를 살아 운동하게 하는 중요한 요소이다. 특별한 경우에는 의미에서 벗어나 리듬만 살아 꿈틀대는 시도 있다. 이준규나 최근 이제니의 시에서 발견되는 것이 그런 예이다. 이러한 시를 의미론적으로 접근하면 독해 불가한 암호처럼 보일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시를 쓰다보면 의미 밖에서 출렁이는 어떤 기운에 따라가는 경우가 있다. 일종의 홀림이요 접신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모든 예술에 공통으로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황홀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어느 한 순간 예고없이 찾아 왔다가 예고 없이 사라진다. 특히 시에서는 그런 현상이 더 뚜렷하게 나타난다. 논리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미지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그 이미지는 최초의 발화로소의 의미를 갖는다. 어디에서도 본 적이 없는 낯설고 기이한 이미지가 의지 밖에서 뛰놀다가 의식 안으로 진입하여 부정형의 형태와 색상을 갖고 돌발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생략된 정보가 많아 일상의 어법으로 바라보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도 있게 마련이다.
이러한 시들은 기존의 독법으로 읽으면 의미망에 잡히지 않아 소통 불능한 시적 주체의 혼잣말로 단순하게 규정하고, 자아의 과잉 증식으로 교감능력을 상실한 시로 몰아붙인다. 여기서 물러서지 말고 한 발자국 더 다가가면 이미지는 하나의 사건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의미 이전에 하나의 모호한 느낌으로 다가오다가 서서히 구체적인 맥박과 박동을 갖게 되면서 살아 운동하는 실체가 된다. 이미지는 새롭게 발생하는 사건이며 역사이다.
돌발적으로 나타난 이미지는 독특한 세계를 창조한다. 너무 낯설어 때로는 이질감을 갖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세계를 새롭게 기술하고 새롭게 발언하는 별종의 언어이다. 이때 대부분의 독자들은 코드가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시를 살해하지만 시는 죽지 않고 도처에서 홀현홀몰하는 유령이 된다. 그러나 유령을 만나면 독자는 무한의 영토로 이주하게 된다. 그곳엔 주민등록번호도 없고 신주소, 구주소도 없다. 다만 한편의 낯선 시가 외롭게 서 있을 뿐이다.
2.
후략......
[출전] 이 글은 『현대시학』2015, 6월호 <권두시론>에서 발췌했음을 밝힙니다. - 시찾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