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도마 - 신기섭
나무도마
신기섭
고깃덩어리의 피를 빨아먹으면 화색(和色)이 돌았다
너의 낯짝 싱싱한 야채의 숨결도 스미던 몸
그때마다 칼날에 탁탁 피와 숨결은 절단났다
식육점 앞, 아무것도 걸친 것 없이 버려진 맨몸
넓적다리 뼈다귀처럼 개들에게 물어뜯기는
아직도 상처받을 수 있는 쓸모 있는 몸, 그러나
몸 깊은 곳 상처의 냄새마저 이제 너를 떠난다
그것은 너의 세월, 혹은 영혼, 기억들; 토막 난
죽은 몸들에게 짓눌려 피거품을 물던 너는
안 죽을 만큼의 상처가 고통스러웠다
간혹 매운 몸들이 으깨어지고 비릿한 심장의
파닥거림이 너의 몸으로 전해져도 눈물 흘릴
구멍 하나 없었다 상처 많은 너의 몸
딱딱하게 막혔다 꼭 무엇에 굶주린 듯
너의 몸 가장 자리가 자꾸 움푹 패여 갔다
그래서 예리한 칼날이 무력해진 것이다
쉽게 토막 나고 다져지던 고깃덩이들이
한번에 절단되지 않았던 것이다
너의 몸 그 움푹 패인 상처 때문에
칼날도 날이 부러지는 상처를 맛봤다
분노한 칼날은 칼끝으로 너의 그곳을 찍었겠지만
그곳은 상처들이 서로 엮이고 잇닿아
견고한 하나의 무늬를 이룩한 곳
세월의 때가 묻은 손바닥같이 상처에 태연한 곳
혹은 어떤 상처도 받지 않는 무덤 속 같은
너의 몸, 어느덧 냄새가 다 빠져나갔나 보다
개들은 밤의 골목으로 기어 들어가고
꼬리 내리듯 식육점 셔터가 내려지고 있었다
-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시
1979년 경북 문경에서 출생.
2004년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200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시 <나무도마>가 당선되어 등단.
2005년 12월 - 교통사고로 사망.
유고시집; 『분홍색 흐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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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도마' 신기섭 시인, 교통사고로 하늘로 | |
[한국일보 2005-12-05 19:03] | |
한 젊은 시인을 잃었다. 지난 4일 교통 사고로 숨진, 지난 해 한국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신기섭(26) 시인. 그는 그 사이 20여 편의 시를 발표했고, 빠듯이 시집 한 권 묶을 만큼의 시를 써 모았으며, 더 열심히 써서 번듯한 방 한 칸 마련할 돈 모으면 함께 살자고 약속한 애인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