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시의 흐름과 천강 시문학 - 유성호
2014년 제 6회 천강문학상 학술대회에 발표된 유성호 교수의 논문을 부분 발췌하여 여기 소개합니다.
현대시의 흐름과 천강 시문학
― 천강문학상 수상 작품을 중심으로
유성호(한양대 국문과 교수)
1. 최근 한국 시 혹은 시조의 지형
두루 알다시피 ‘시(詩)’의 본래적 권역은 절실하고도 남다른 자기 확인의 욕망에 있을 것이다. 그것이 나르시시즘 차원의 자기 몰입이든, 고통스런 반성을 동반하는 자기 성찰이든, 시의 초점이 시인 자신의 자기 검색과 확인에 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물론 주체와 대상 사이의 날카로운 균열이나 갈등 양상을 포착하고 드러내는 이르는바 비동일성의 미학까지 포괄하는 것이 우리 시대 서정의 원리이기는 하지만, 그럼에도 서정의 근원적 자기 회귀성은 그 비중이 줄어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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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천강문학상 수상작의 양상 – 시조의 경우
시조의 경우는, 비교적 창작 연조가 짧은 시인들의 것이었을지라도, 그 안에서 확연한 세대론적 표지(標識)를 발견하기는 어려웠다. 다만 그들은 파격적 실험 정신보다는 시조의 완결성에 강한 미적 애착을 보였고, 새로운 소재나 어법 확충보다는 그동안 누적되어왔던 소재와 어법을 그들 나름의 세련성과 문법으로 재구하는 모습을 집중적으로 보여주었다. 이것은 ‘시조’라는 양식이 전통 갱신의 차원보다는 전통 계승적 차원을 먼저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정격의 언어를 통해 완결성의 미학을 구현하려는 시인들의 욕망이 작용한 까닭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시조 미학 역시 고전적 절조와 삶의 구체성이라는 표지는 여전히 중요한 천강문학상 수상 기준이었다고 판단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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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면 열려라 뚝딱
천국 문도 연다는
우리 동네 공인9단 열쇠 장인 김만복 씨
꽉 잠긴 생의 비상구, 정작 열 줄 모르면서
헌 잡지처럼 찢어버린 과거는 묻지 마라,
기꺼이 갇혀 사는 반 평 독방 컨테이너
탈옥은 꿈꾼 적 없다
반가부좌 부처인 듯
호적조차 말소당한 애물단지 스쿠터는
꽃을 받고 훌쩍이던 다 늙은 아내인지
이따금 딸꾹질하는 빗장뼈가 수상한데
온 세상 잠긴 문은 노다지, 노다지라
불러줍서예,
집집마다 전화번호 붙여놓고
만萬 가지 복福 중에 하나
느긋이 찻물 우린다
― 박해성, 「만복열쇠점」(제4회)
이 시편은 우리 삶의 주변부 일상을 매우 구체적이고 실감 있는 언어로 재현한 산뜻한 결실이다. 삶에 대한 진한 애정과 미감 그리고 그 안을 흐르는 어김없는 비애도 시인은 놓치지 않는다. 열쇠점을 하고 있는 “우리 동네 공인9단” 김만복 씨는 “척하면 열려라 뚝딱/천국 문도 연다는” 사람이다. 하지만 그 “열쇠 장인”조차 정작 “꽉 잠긴 생의 비상구”는 열지 못한다. “헌 잡지처럼 찢어버린 과거” 때문인지 아니면 “기꺼이 갇혀 사는 반 평 독방 컨테이너” 때문인지 그의 삶에는 짙은 페이소스와 함께 가라앉은 삶의 침전물이 가로놓여 있다. 하지만 이 ‘만복열쇠점’에서의 탈옥은 한 번도 꿈꾼 적 없는 그는, 어느새 “반가부좌 부처”가 되어버렸다. 그리고 “애물단지 스쿠터”와 “다 늙은 아내” 같은 대상들이 그의 낡아가는 삶을 은유해주면서 “이따금 딸꾹질하는 빗장뼈”로 전이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 세상 잠긴 문”을 다 ‘노다지’라고 표현하는 그의 인생은 “불러줍서예”라는 익살맞은 표현 속에서 위안과 긍정을 얻고 있다. 자신의 이름처럼 “만萬 가지 복福 중에 하나”로서 찻물 우리고 있는 그의 삶에서, 우리는 어느새 느긋하고 긍정적인 한 삶의 장인(匠人)을 만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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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한국 시 혹은 시조의 미래
우리가 살핀 천강문학상 대상 수상 시인들은, 난해한 미적 원환에 갇히지 않고, 다양한 상상력과 사물의 비의를 투시하는 구체적인 형상화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들의 작법과 주제 의식은 시와 시조가 지켜왔던 동일성을 건실하게 유지하면서도, 현대성에 때로는 발맞추고 때로는 맞서면서 이루어졌다. 근대의 극점이 다가올수록 시와 시조가 가진 고유한 언어적 섬광이 긴요하게 요청되는 요즘, 내용과 형식 사이에 상존하는 긴장과 상충을 감안하면서 검증된 양식적 미덕과 개척해가야 할 현대성 사이에서 완미한 미학을 이루어가는 이들의 존재는 한결 미덥고 소망스러운 것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개괄적 일별이라는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글은 이러한 그들의 징후와 가능성을 적극 추인한 셈이다. 모두 자신의 특장을 보다 더 깊이 추구하고 확장하여, 큰 시인들로 거듭나기를, 마음 깊이 소망해본다.
유성호
- 연세대학교 국문과 및 동대학원 졸업(문학박사).
- 서울신문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 현재 한양대학교 국문과 교수.
- 지은 책으로 『움직이는 기억의 풍경들 』『정격과 역진의 정형 미학』등이 있음.
- 김달진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