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리인간 증후군 - 홍순영
유리인간 증후군*
홍 순 영
오늘도 유리들은 소리 없이 나의 지문을 훔친다
나의 이력은 조금씩 벗겨져 그들의 기억에 쌓이기 시작한다
한 곳을 오래 서성이는 자,
감정의 파문이 넓은 자,
나는 아무도 들여다보지 않는 어둠 속에서 홀로 소용돌이친다.
유리가 나를 훔치는 동안 내 몸에 번식하던 균열
단단해지고 싶다는 욕망이 나를 비추는 순간
나는 한 장의 소음으로 바닥에 눕는다
나의 귀를 밟고, 입술을 뭉개며 태연히 지나가는 사람들
문이 열리며 부서진 내가 건물 안으로 빨려든다
나는 사람들 옷자락에, 핸드백에, 머리카락에 조용히 들러붙는다
쇼윈도에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다가 유리조각을 발견하고 흠칫 놀라는 사람들
나는 수백 개의 지문을 지닌 채 유령처럼 사람들 사이를 떠돈다
처음의 나로 돌아갈 수 없다
문을 밀치며 밖으로 나오자 습관처럼 나를 훔치는 유리
나의 지문은 반사적으로 좀 더 딱딱해진다
* 어디에 조금만 부딪쳐도 쉽게 깨지고 부서지는 증상으로 골석화증이라고도 한다.
[출처] 웹진 <시인광장> 23012, 4월호 신작시
인천 출생.
200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창작지원금 수혜.
2011년 《시인시각》등단.
시집; 『우산을 새라고 불러보는 정류장의 오후』(문학의전당, 2011).
2011년 제13회 수주문학상 대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