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로 무렵 - 윤의섭
윤 의 섭
바람은
바람이기 전에 달빛이었느니
만질 수 없는 것들이 오래 묵으면 저렇게 간절한 이무기 되어
풀잎의 신을 신고 숲의 옷을 입고 유랑한다
참으로 긴 나날을 은밀히 이어온 이주
무수한 바람이 생멸하였으나 뼈 속에서도 모체의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고
달 쪽으로는 고개조차 돌려본 적 없다
달빛 머금은 이슬이란 그러므로 바람의 마지막 모습이다
먼 행성으로부터의 연착륙 이른 아침의
물컹한 결집 군집 운집 응집 그리움이란 소리 소문 없이 다가서서 가슴에 뭉치는 것
풀잎 끝에 피어난 이슬의 위치가 달빛이 도달할 수 있는 궁극의 벼랑이라는
생각은 내가 궁극의 그리움으로 벼랑 끝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는 생각과 무엇이 다를까
달빛과 바람과 이슬의 잠행처럼 얼마나 내밀해야 하는 걸까
월력을 마감한 늙은 달의 내음 가끔 비치던 금성의 내음 아침노을의 내음 스산한 구름 내음 어느 이국의 거리를 떠돌던 낙엽 내음 출근길 행인의 머리칼 내음 따스한 눈빛의 내음 상냥한 인사의 내음 침묵의 내음 무심히 사라지는 내음 어딘가에 숨어있다 홀연히 나타나는 내음 전날 전전날 그전전날 맡아보았던 내음 결로 무렵엔 문득 떠오르지 않는가 달이 생겨나던 날의 비릿한 내음까지
이슬은
이슬이기 전에 숨이었느니
잊혔었거나 한 번쯤 죽었다 살아나 간신히 피맺힌
- 계간 『시산맥』 2012년 봄호 발표
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
- 아주대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 등단.
-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문학과지성사, 1996), 『천국의 난민』(문학동네, 2000),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문학과지성사, 2005) , 『마계』(민음사, 2010).
-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