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

소문들 - 권혁웅

heystar 2011. 2. 19. 17:31

 

                  소문들

                   - 짐승

 

                                            권혁웅

 

 

     1.

창피猖披란 짐승이 있어, 무안無顔과 적면赤面 사이의 좁은 골짜기에 산다 야행성이라 잘 눈에 띄지 않지만 간혹 인가에 내려와 쓰레기통을 뒤진다 팔다리가 가늘고 귀가 뒤로 말려서 비루먹은 곰처럼 생겼다 산정을 좋아해서 오르다가도 꼬리가 무거워 늘 골짝으로 떨어진다 이 짐승의 가죽을 얻으면 얼간망둥이를 면할 수 있다

 

    2.

낭패狼狽는 이리의 일종이다 낭은 뒷다리가 짧고 패는 앞다리가 없어서, 길을 가려면 반드시 두 마리가 짝을 이뤄야 한다 전하여 서로의 배필을 찾지 못했을 때를 낭패라 하고, 동성의 짝을 만나 겹으로 쓸모를 잃었을 때를 낭낭패패라 한다 이 짐승을 달여 먹으면 어지자지가 떨어져 한 몸이 둘이 된다

 

     3.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말이 있으니 이를 무족마無足馬라 한다 인적 끊긴 지 오래인 인가의 굴뚝을 끌어안고 살다가, 성체가 되면 인가 지붕 위를 뛰어다니며 긴 혀로 수염에 붙은 침이나 귓속의 귀지를 핥아 먹는다 한 마리에 천 냥이나 하는 귀한 짐승이어서 특별히 이 짐승 기르는 일을 업으로 삼은 자를 말전주꾼이라 부른다

 

    4.

암상이라고도 부르는 질투嫉妬는 암컷이고, 수컷은 시기猜忌라고 부른다 떼를 지어 다니며 사람을 잡아가서는 벼랑 위에서 밀거나 동굴에 가둔다 육질을 연하게 하거나 소금물에 재워두기 위해서다 송곳니와 어금니가 두루 나 있어서 고기를 자르거나 으깰 수 있다 구들직장이 아니고서는 이 짐승의 눈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다

 

    5.

외설猥褻은 사면발이의 한 종류다 눈이 작고 앞니가 돌출해 있어서 서생鼠生을 닮았으나 그보다 작고 바글바글하다 어느 구멍이든 파고들기를 좋아해서 한 번 자리를 잡으면 색출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 하나를 잡으면 둘이 나타나고 둘을 죽이면 넷이 나타나, 마침내 온 집을 가득 채운다 더러우니 먹어선 안 된다

 

     6.

개차반 있는 곳에 파리가 있으나 개 중에는 군집을 싫어하는 놈들이 있어서, 이를 청승靑蠅이라 한다 볕 잘 드는 곳에서 눅눅한 날개 말리기를 좋아하는데, 그러다 간혹 날개가 바싹 말라서 굶어죽기도 한다 몸 전체가 푸른빛이어서 청백리들이 좋아한다 처마 밑에서 겨울을 나지만 뇟보나 계명워리가 드는 집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다

 

                                                                       ―《문예연구》 2010년 봄호